일기

글나부랭이/오래된나무문 2010.09.07 13:41
집이 완전히 경매로 팔리고 작은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작은 집이 참 좋다.
가족이 오랜만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도 나름 괜찮고,
작은 집에 맞추기 위해 필요없는 물건들을 싹 버린 것도 매우 홀가분하다.
무엇보다 청소가 매우 편하다.

오랜만에 집을 옮기는 일이라 묵혀둔 옛날 물건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중 촉박한 이사 일정에도 자꾸 주춤거리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국민학교시절 일기와 성적표,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
고등학교 1학년때 받은 롤링 페이퍼 따위들이다.


내 기억속에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워낙 나를 추앙해주셔서 기고만장했고
나를 못마땅해하던 6학년 때 선생님과 자주 일기장 배틀을 하던 것이 남아있다.
이제껏 나는 갓 교대를 졸업하고 오신 6학년때 선생님의 미숙함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나는 6학년때 왕따 비슷하게 친구들의 신임을 완전 잃었었고
그것이 중학교에서 내 성격을 좀 바꾸게 되었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빨간 펜으로 얼룩진 6학년 때 일기를 다시 보니,
전혀 다른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는데 실상 그 선생님은 나를 한 인격으로 대해주셨고
그것이 내게 미친 영향이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이것저것 따지고 드는, 의도적인 것이 분명한 일기에
화내고 쥐어 박고 끝내는 게 아니라 빨간 글자로 늘 대답해 주셨던 것들,
친구들과의 갈등을 겪는 자아가 매우 강한 아이에게 어떻게 져 주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계셨고
보통의 선생님은 포기하고 마는 소위 문제아를 내 짝으로 만들어 도와주라고 하셨고
늘 꼴통에게 더 기회를 주는 것이 못마땅해 하는 내게  니가 잘 견뎌주어 고맙다, 라는 빨간 글씨로 답해주셨다.

나는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 분의 영향을 참 많이 받은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일기를, 18년 전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매우 자연스럽게...
한번도 고맙다고 말씀 드린 적도 없고, 오히려 미움의 대상으로 생각해왔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왜곡된 기억을 가진 나에게, 또 기억력이 매우 나쁜 나에게,
기록이란, 참으로 고마운 것이다.

내가 또 잘못하는 보관에 힘써주신 엄마께 심심한 감사를...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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